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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을 알 수 없는 절정의 순간에도 생명력은 들끓는다 -아트조선 윤다함 기자

작성일 19-05-30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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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조회 7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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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함명수 작가
에스키스 없이 즉흥적으로 그리는 ‘열린결말’ 그림
물감 긁어내어 생명감 있는 화면(畫面) 실현
‘Art Chosun on Stage Ⅱ’ 조선일보미술관 기획전
‘Alive, 그려지는 대로 그리고 그리다’, 6월 27일부터 7월 7일까지

 
말라비틀어진 형상이 꼭 미라 같아 툭 건드리면 무너져 내릴 것이 분명했다. 이미 죽은 것들 아래로는 푸릇한 새싹이 막 움트고 있었다. 죽음과 삶이 동시에 벌어지는 현장에서 그 강렬한 대비에 매료된 작가는 곧장 화실로 뛰어가 노트를 챙겨와 홀린 듯이 이를 드로잉했다.
 

썩어 스러져가는 뉘런 옥수숫대는 함명수(53)의 캔버스에서 생명 가득히 다시 태어났다. “작업실 근처를 거닐다 우연히 옥수수밭을 봤어요. 수분이 다 빠져나간 옥수숫대들이 죽어있었죠. 하지만 그 모습이 그렇게 역동적일 수 없었어요. 꼿꼿이 선 채 죽은 육신이 갓 생동하는 들풀과 제비꽃을 품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죽음과 삶이 교차하며 강렬한 생명력을 내뿜더군요.”
 
 
함명수의 화두는 한결같았다. 인생을 바꾸는 글귀 한 구절, 영화 한 편처럼 누군가의 삶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돼 줄 수 있는 그런 그림, ‘살아있는’ 그림을 그려내고 싶었다. 그 실마리는 생명력에 있다고 믿었다. “어떤 작업은 저를 너무도 지치게 하고 진기를 다 빠지게 한다면, 어떤 때는 제 스스로 무아지경에 빠져 힘들기는커녕 기운을 차리게 해주는 그림도 있거든요. 작가가 기운을 받은 그림이라면 보는 이에게도 같은 에너지를 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즉, 나를 살리는 그림이 살아있는 그림인 거죠.”
 

몇 년 전 그는 세필로 필치를 살린 이른바 ‘면발풍경화’로 재미를 봤지만 정작 작업은 재미가 없었단다. 스포일러를 당해 이미 결말을 아는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푹신하게 깔아놓은 길을 걸어가는 기분이랄까요. 포근함에 홀려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어느 순간 그 끝자락이 뻔하더라고요. 사전 준비와 설계에 따라 정해진 대로 진행되는 방식에 회의가 들었던 거예요.”
 

 
작가는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시장 반응이 좋은 작품에 매달릴 만도 했지만 안주하지 않고 쉼 없이 변화하며 다양한 시도를 이어온 이유다. 어느 날은 마음처럼 풀리지 않는 작업에 역정이 나 세차게 드로잉하다가 종이가 찢겼다. 펜을 꾹꾹 눌러 그리다 보니 종이 결이 일어난 것. 그때 작가가 들은 건 지금껏 넘어설 수 없던 벽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종잇장이 찢기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어요. 진척 없던 작업이 뻥 뚫리는 것 같은 쾌감이었죠. 바로 이거다.” 그렇게 갈구하던 생명력을 화면에 실현하는 데 조금은 가까워진 것 같았다. 이때부터 부러진 나이프나 몽당붓으로 노트 종이를 긁거나 뜯어내길 반복하며 즉흥성과 질감을 살린 고유의 조형어법을 발전시켜갔다.
 

동일한 행위는 캔버스로 옮겨왔다. 에스키스 없이 무작정 캔버스 한구석에 유화물감을 두툼히 올려놓고 이를 몽당붓으로 긁어내며 드로잉에서 느꼈던 맛을 재현했다. 찰나의 감흥이 거칠게 담기는 드로잉처럼 그의 회화는 살아있는 듯 순간순간 반응했다. 긁어내고 덜어내어 채워가는 일순의 호흡과 무의식적인 움직임을 화면에 그대로 기록해 역동하는 생명감을 드러냈다.
 

결말을 알 수 없는 절정을 향해가는 그의 여정에 낯섦과 설렘은 필연적일 터. 이전 작업에서는 경험할 수 없던 것들이다. 이로써 함명수는 드로잉과 페인팅의 경계를 허물고, 붓질에 천착하던 기존 작업에서 벗어나 한결 자유로워졌다. 긁어냄으로써 30년 화업에 없던 흥미로운 지점이 열린 것이다.
 
 
그에게 있어 존재론적 의미를 일깨워준 드로잉에서 기인한 새로운 회화 시리즈가 공개된다. 함명수 초대전 ‘Alive, 그려지는 대로 그리고 그리다’가 6월 27일부터 7월 7일까지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열린다. 즉흥적으로 속도감 있게 물감을 긁어낸 신작 <Alive> 시리즈 30여 점이 내걸린다. 성공적인 전작에 매몰되지 않고 대담한 도전을 이어가는 50대 중견 작가의 새로운 지평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온갖 매체가 혼재하는 동시대 미술의 흐름에도 함명수는 동요하지 않고 오늘도 묵묵히 이젤 앞에 선다. 그를 살리는 것은 오로지 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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