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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저널 인터뷰, 2009,12

작성일 19-05-05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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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명 : 책을 그리는 작가전 12

제목 : 미술의 고향을 찾아 떠나는 탐험가, 화가 함명수- 2009. 12월
 

특정한 계절에 유독 어울리는 그림이 있다면, 찬바람이 거세게 살을 에는 듯한 이맘때 유난히 가슴에 저미는 그림은 무엇일까. 함명수의 그림은 온기가 절실해지는 때 적재적소로 스며드는 힘을 갖고 있다. 두둑한 스웨터라도 짤 수 있을 법한 실타래를 촘촘하게 얹어놓은 것 같은 그림은 온통 붉으락푸르락 더운 기운을 발산한다. 높다란 빌딩숲에서 흩뿌리는 냉기가 사방 진동하는 도시의 스산함을 단번에 녹이는 열기를 내장한 것만 같다. ‘Hug me’를 해서라도 일시적으로나마 사람의 체온을 느끼고 싶은 초겨울, <출판저널>은 함명수의 정감 있는 그림이 내밀하게 내파하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보았다.

글_박정준 객원기자 사진_박정은
 

‘책 그리는 화가’ 프로젝트 일년 나기
<출판저널>이 2009년 한 해 동안 ‘책 그리는 작가’ 시리즈에서 만나본 예술가들은 책이라는 공통된 소재를 주요하게 사용한다는 공통점 말고는 차이점들이 두드러졌다. 책에 대한 예술가들의 인식론적인 생각도 각자 판이하게 달랐으며, 책을 제재로 삼는 이유도 십인십색이었다. 지식의 보고라고 일컬어지는 책을 신성시해서 범접 불가능한 영역에 잠시라도 귀의하고 싶은 욕망에서부터, 케케묵은 책의 권위를 반문하는 문제의식도 뒤따랐다. 또한, 책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책을 관념적으로 사유하기보다, 예술적 특성을 강화해서 책의 외형을 미학적으로 감상한 후 형상화하는 태도가 자주 눈에 띄었다. 얼마 전 출간된 <춘향전>에는 함초롬한 삽화들이 단아하게 배치되었다. 한국인들에게 책과 그림의 상호작용이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점을 자연스레 알리는 사례일 듯하다. 나무를 잘라서 활자를 새긴 책이라는 종이묶음에, 공산품 이상의 의미를 더하는 것은 문자를 숭상해온 민족으로서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책 그리는 작가’ 시리즈는 한국사회에서 미술과 책이 만나는 상호작용에 대해 천착할 수 있는 유의미한 기회로 연결되었다. 책과 미술의 특성이 어떻게 교합할 수 있는지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감상하면서, 두 매체를 신선한 눈으로 바라보는 비교학적인 경계 넘나들기의 생생한 보고이자 기록이었다. 인간의 정신세계의 지평을 아우르는 예술과 책이 문화의 수요를 만드는 역동적인 힘으로써 사람들 곁으로 다가가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다. 어느 나라와 비견될 만큼 책을 소재로 비일비재하게 이용하는 현상은, 고즈넉한 정물화에서 화석화된 물건으로 죽어있는 책들과는 사뭇 다르다. 작가와 책, 그리고 책과 감상자들이 생생하게 만나는 소통의 현장으로,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책의 의미가 중요하게 다루어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노력과 집념으로 일군 예술혼
함명수의 그림은 예술가로서의 소명을 부여 받은 천재적 영혼이 도발적인 삶과 불길 같은 열정으로 파멸하기 직전의 긴장미를 표현하는 작품들과는 다르다. 그의 그림을 차근차근 채워나가는 동력은 누구 못지않게 정력적으로 자신을 할애하는 노력과 근면함에서 비롯된다. 특별히 몸이 골골하지 않는 한, 일 년 365일 아침마다 작업실에 도착해서 자정이 가까워올 무렵까지 그림을 그리는 자기절제는 웬만한 극기를 쉽사리 뛰어넘는다.
지하생활자로서 몇 년간 그림을 그리던 음습한 지하 작업실에서 건강이 훼손되는 바람에, 얼마 전 작업공간을 지상으로 옮겼다는 그는 널따랗게 자리 잡은 작업실에서 하루 종일 사투를 벌이듯 그림을 완성해나간다. 일종의 장인처럼 정교한 수제 작업을 캔버스에 벌이는 그는 온몸이 결리고 손이 딱딱하게 굳을 만큼 좀처럼 붓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도시를 미학적으로 보다

함명수가 오래도록 끌어안은 주제는 도시의 풍경이다. 온갖 모양으로 수많은 선을 그은 도시의 풍광은 아름다움 자체를 탐색하고 싶어 하는 섬세한 예술가에게 매혹적으로 각인된다. 쌔고 쌘 예술가들이 현대도시의 익명성이 빚어내는 소통불가와 인간소외의 참상을 냉소적으로 비판할 때, 그는 작지만 소중한 자신만의 미학적 표현을 담장 없는 울림처럼 메아리쳤다. 미술이 미술다워지기 위해서는 언어적 서사방식과의 차별화가 필요하며, 내러티브를 통해 작품성이 설명되는 방식을 지양해야 한다고 바라본다. 흔해빠진 이론처럼 ‘기표가 기의를 통제할 수 없지만’, 그 기표를 환유하는 방식도 언어라는 상징체계에 기인하는 점을 그는 몸서리치게 꿰뚫는다. 부디 미술을 감상할 때만은 공고한 언어적 상징을 잠깐이라도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길쭉하게 직립해있는 빌딩의 모습은 나름대로 책의 측면과 흡사하기에 그는 고층빌딩들로 둘러싸인 도시를 보며 책을 구상한다. 나아가, 도시를 울긋불긋 색칠한 빛깔을 통해서 도시의 구성원들이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사연들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도시의 파수꾼들 역시 일종의 색깔이나 소재로 파악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이 어떠한 내러티브를 문학적으로 상상하거나, 작품 외적인 세계를 빌어서 그림을 이해하는 태도를 자못 경계하는 편이다. 미술이 미술 자체로 받아들여지기보다, 이야기적인 측면이나 미술사적인 영향과 수용관계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되는 것을 짐짓 비판하는 것이다. 일종의 정신적 귀족주의다운 양상으로까지 비치는 그의 예술관은, 예술이라는 장르가 예술 바깥의 입김으로 평가되는 현상의 폐해를 간파한 데서 기원한다. 그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움 자체를 그리고 싶어 한다. 캔버스 가득 압도적으로 퍼지는 색채의 분방함은 그의 개성으로 압축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미술사를 진중하게 사숙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세계에서 살아온 삶이 독자에게 주는 감동 못지않게 작가 자신을 풍요롭게 가꾼 힘이 있어서인지, 자신의 작품세계를 전달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구성진 힘이 담겨있었다. 그 동안 창작한 작품들을 정성껏 스크랩한 여러 권의 포트폴리오는 마치 일군의 작가들의 작품을 한 데 모아놓은 것처럼 다채로운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의 그림을 보노라면 작가가 영향을 받아온 몇몇 작가들이 슬며시 떠오른다. 달리의 초현실주의의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작품들에서부터, 데미안 허스트의 감각적이고 냉혹한 아름다움, 빈센트 환 호흐의 폭발하기 직전의 표현주의적 특성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표현주의에서부터 초현실주의, 사실주의 등 여러 사조를 사숙한 그의 학습 이력이 오롯이 담긴 작품들은, 표현상의 여러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함명수만의 개성을 공통적으로 보유하고 있다. 물감이나 종이가 제 스스로 발휘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는 자세나, 캔버스에 풀이나 털의 형상을 물감으로 덧입히는 방식이 연거푸 구사된다는 점이다.
온갖 종류의 그림이 통째로 모아진 포트폴리오들을 취재진에게 보여주는 그에게서 화가로서의 열정이 비친다. “전문성을 배가하기 위해 화가로서 견지해야 할 노하우를 온전히 터득하려고 힘씁니다. 특히 물감이나 유화의 특성을 제대로 살려내려는 바람이 강합니다.”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회화 실험을 거듭해온 그는 자신만의 화법을 연달아 개발하게 된다. 유화와 수채화가 동시에 구성되기도 하고, 붓칠하는 시기를 달리 하면서 시간의 변화를 그림에 새겨 넣기도 하며, 일단 연필로 정교하게 스케치를 한 다음 유화물감이 그 위에 두둑하게 포개지면서 다채롭게 움직이도록 운동성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화가가 원래 의도한 대로 고정되지 않고 흘러내리는 물감의 속성은 더욱 생동감 있는 색조를 창조하는 원동력으로 받아들여진다.
“여러 실험을 거듭하면서 고충이나 에피소드도 적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그림을 거꾸로 그릴 때는 나중에 피가 역류하는 것 같은 현기증마저 느꼈습니다. 얼마 전에는 전북 부안의 채석장에 갔습니다. 이러한 여행과 관찰이 고스란히 드로잉 연작으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층마다 색깔이 사뭇 다른 채석장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채석장 연작을 그릴 때는 동화적인 상상력이 발동되어서 로봇이 스멀스멀 출동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책을 이미지로 먼저 보다

이쯤해서 그가 책을 제재로 삼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채석장 연작을 진행해 나가다 보니 자연스레 책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저는 다른 것들보다는 책의 외형적 측면과 결 모양에 관심이 지대합니다. 책의 외향은 붓질이 스치고 간 흔적과 비슷하죠. 게다가 보통 책은 지식 내지 지혜를 뜻하지만, 저는 다른 시각을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책을 내용이나 의미로 익숙하게 파악하기보다, 일종의 미적 이미지로 보려는 경향이 제가 끌어내려 했던 핵심입니다.”
그의 널찍한 작업실에 책이 거의 없다는 점은, 그의 관심사가 책보다는 책의 포맷에 경도돼 있으며, 그가 책을 읽는 독자라기보다 책을 바라보는 감상자라는 점을 가리킨다. 우리 주변에서 책을 시각적 이미지로 활용하는 것은 뜻밖에 드물지 않다. 책을 주된 인테리어 소품으로 활용하거나, 곱다랗게 제본하는 양장본은 내용보다는 미적인 측면에 기울어진 예들이다. 그만큼 책의 외형이 어떠한 사물보다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재현에 대한 오래된 고민

“제 작품세계를 아직껏 지탱해온 힘은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소년 시절 미대 입시를 준비할 때는 보통 최대한 사실과 가깝게 사물을 묘사하면서 재현하는 기술을 연습하죠. 하지만 차츰 전문적인 화가로 성장해가면서 사실과 거리를 두고 재현하면서 자신의 주관성을 표현하고 싶어 합니다. 저 역시 뭔가 색다르고 유희적으로 재현하고 싶었습니다. 사과를 그리면서도 사과가 아닌 것처럼 그리고 싶은 이율배반적인 표현방법을 성취하고 싶었습니다.”
아름다움에 유독 민감한 화가의 작품이 대중적으로 애정을 받을 것 같다고 추측하자, 정작 그의 작품을 난해하다면서 거리를 두는 감상자들도 존재한다고 속삭였다.
“작품을 창작할 때 대중의 취향을 거의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제가 천착하는 테마가 도시풍경이나 털이나 풀인데, 한 번도 대중적·상업적 인기에 영합에서 주제를 선정한 적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형상화하려는 그림을 완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죠. 언젠가 반드시 다다르고 싶은 이상은 상징적인 의미전달에 국한되는 그림에서 자유롭게 초월하고 싶은 열망입니다. 책을 그리더라도 책을 사실대로 재현하려는 강박에서 해방되면, 책을 독특하게 재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혹독한 극기로 완성되는 화룡점정

그동안 빽빽하게 써내려간 작업노트만 해도 이미 40권 이상이 훌쩍 넘는다는 그는 뭐든지 쉽게 내다버리지 않는다. 예컨대, 군대시절 무료하고 답답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 나무를 주어다 부단하게 깎아낸 조각상에서부터, 대학시절 습작까지 그는 어느 것 하나 쉽사리 버리지 않고 금쪽 같이 간직하고 있다. 온힘을 다 바쳐 만든 작품 하나하나에 그의 영혼이 내밀하게 박혀있듯이 그는 작품 하나하나를 소홀하게 다룰 수 없다.
“제가 펼치는 작업들은 공통적으로 엄청난 에너지와 집중력을 요구합니다. 진지하게 정신을 가다듬지 않으면 필경 작품이 마음대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방법 중의 하나가 캔버스에 물감을 칠한 후 마르기 전에 다시 덧칠하는 것입니다. 성취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시간을 예리하게 맞추어야만 색채의 물성이 잘 살아납니다. 감각이 제대로 작용해야만 좋은 작품을 완성할 수 있기에 몹시 공을 들여서 작품을 창작하는 편입니다.”
 

함명수만의 작품 분양 방식

그러나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 다른 부업을 갖지 않은 그는 경제적인 고충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손이 많이 가서 한 점을 끝맺기 위해서는 으레 한 달 이상이 소요된다.
“비교적 경제적으로 안락하지 않게 살아서 아끼는 작품이어도 기회가 되면 소장자들에게 넘깁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고 창작할 수 있는 기반이 확보되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결코 상업적인 이윤만을 좇으며 작품을 생산하지는 않습니다. 몇 년 전 아주 분주한 일정 속에서 전시회 일정을 맞추기 위해 작품을 재빨리 완성해서인지 작품들이 마음에 차지 않았습니다. 전시회 기간 내내 그림이 팔릴까 봐 부담스러웠습니다. 전시회가 마침내 끝난 후 팔리지 않은 작품들을 죄다 폐기처분했습니다. 다른 전시회에서도 마음에 들지 않은 작품이 있어서, 전시회 이후 다시 수정보완작업을 오래도록 펼친 적이 있습니다. 화가로서 제 이름을 걸고 전시되는 작품들이기에 책임감을 갖고 작품 하나하나에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도 완벽주의를 기저에 깔고 작품 활동을 펼친다고 이야기할 만큼, 그림이 뜻대로 그려지지 않을 때 대단히 속상해한다. 예술가로서의 치졸함을 철저히 거부하며 그는 손쉬운 타협을 선택하지 않는다. “전시회는 제가 소화할 수 있을 만큼만 엽니다. 그림은 마음먹은 대로 척척 그려지는 공산품이 아니죠. 정녕코 작품이 창작되지 않으면 차라리 전시회를 취소해서라도, 마음에 들지 않은 작품들을 감상자 앞에 내보이지 않으려 합니다.”
 

끊임없이 변모하는 진취적 화가

그는 작품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을 때 자전거를 타고 근처에 위치한 한강을 유유자적 맴돈다. 영화를 보거나 가끔 술을 홀짝거리면서 삶의 여유를 만끽한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즐겨서 단 한 번도 다른 직업을 꿈꾼 적이 없었다는 그는 앞으로도 계속 화가로 살고 싶다고 소탈하게 이야기했다.
새끼손가락보다도 몇 뼘 작은 여린 붓으로 정밀하게 그림을 그려나가는 그의 작품들은 보는 이에게 열정과 노력의 자취가 역력히 아로새겨진다. 유화의 특성을 꾸준히 연구해서 재료의 물성을 다채롭게 실험하고 싶다는 그는 앞으로 하고 싶은 계획이 풍성하다.
“일단 내년까지 스케줄이 꽉 차서 당분간 몹시 분주할 것 같습니다. 다산성으로 작품을 창작하려면 그만큼 부지런하게 그림을 그려야 할 것 같아요. 일단 내년에 계획된 일정을 잘 소화해내는 것이 첫째 바람입니다. 더불어 앞으로도 과거에 정체되지 않고 끊임없이 미래로 흐르며 변모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싶습니다.”
 

미 자체를 담는 화필

노력과 집념으로 그림을 그려온 그의 현재는 탄탄한 그리기 능력과 색채에 대한 명징한 이해로 결실을 맺고 있다. 기본을 탄탄하게 쌓아온 그는 여러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힘을 기른 것이나 진배없다.
이제 그의 작품에서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경청하기보다, 아름다움의 세계 속에서 일상을 잠시나마 탈주하는 순간을 부여받으면 어떨까. 전 세계적으로 전대미문의 미술시장의 호황과 미술 감상자들의 증가, 미술평론이나 문학과 미술의 비교문학적 연구가 줄을 잇는 상황에서, 정작 아름다움이 누락되고 마는 모순적인 미술계의 허황한 분위기는 여러 차례 지적되어왔다. 이즈음 그의 작품은 얼핏 ‘정전’을 찾아서 고독한 여행을 감행하는 항해자를 떠올리며 진부하지 않은 감동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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