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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호 평론글(갤러리 스케이프 개인전), 2008, 06

작성일 19-05-04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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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호 평론글 - 2008. 6월
 



함명수의 회화론 : 노동력과 그리기의 논리 ● 필자가 함명수를 만난지는 그다지 오래진 않다. 두 번째 찾은 그의 작업실. 물감의 향기로 채워진 작업실 벽에는 커다란 캔버스가 세워져 있고, 화면은 작가의 집요한 노동력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캔버스 앞에 놓은 물감과 붓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팔레트를 대체한 물병의 굴곡엔 촉촉한 물감들이 생기를 발산하고, 가느다란 붓과 붓의 손잡이는 수많은 캔버스와의 접촉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각형의 캔버스는 작가의 집요한 노동력을 가시화하고, 붓의 필촉과 손잡이로 그려진 화면의 이미지는 그리기의 열정을 확인하게 한다. ● 필자의 기억에 자리한 작가의 작업실. 집요한 노동력과 그리기의 열정이 십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질 않았다. 무엇이 그에게 이렇게 어렵고 힘든 노동력을 요구하는지. 화면의 이미지와 이미지에 파고든 헤아릴 수 없는 손놀림이 상호간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고집과 열정이 궁금증을 자극하면서 관객과 조우하기를 시도한다. 역사 속에 자리한 예술가의 노동력이 회상된다. 빈센트 반 고흐의 화면이 드로잉과 색깔의 조화로 노동력의 찬미를 가시화하고, 재현의 이미지에 그리기의 노동력을 첨가하여 회화의 노정에 음향을 들려주는 표현주의자들, 사진의 이미지를 그리고 그려진 이미지를 부드러운 붓으로 지워내 예술가적 노동력의 흔적을 지워낸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화면들. 이렇듯 함명수의 캔버스는 현대미술의 노정을 관통하면서 우리와 가깝게 다가서기를 시도한다.
 

붓의 흔적을 그리는 작가로 알려진 함명수 ● 그의 노정은 노동력=회화에서 찾아진다. 화면의 이미지는 그리기의 열정을 변함 없이 재현(Re-Presentation)할 뿐이다. 현대미술이 선사한 이미지의 논리가 그의 캔버스에서는 그리기의 노동력으로 전환된다. 어렵고 힘든 노정임에는 틀림없다. 드로잉은 회화이고, 그리기의 즐거움은 붓의 유희이고, 캔버스의 표면은 붓의 흔적이고, 붓은 흔적은 사물의 대상화에 있고, 사물의 모티브는 회화의 모티브이고, 화면의 모티브는 시각의 즐거움이고, 시각적 즐거움은 캔버스와 관찰자의 과제가 되는 그의 노정. 섬세하고 세밀한 분석이 요구된다. 자연의 생명력이 붓의 유희로 번역된 한강변에 자라는 「민들레」=회화의 모티브, 혼잡한 도시의 풍경이 그리는 노동력으로 가시화된 「재건축」=시각적 회화, 기억 속에 자리한 동심의 꿈들이 시각으로 번역된 「달」=시각적 논리, 시간의 본질이 흐름이고 흐르는 시간의 층들이 그려진 색과 색의 붓놀림으로 독해된 「책의 퇴적」=회화의 모티브. 이번에 선보이는 이 작품들은 이미지의 논리와 그리는 노동력의 종합이다. 모티브가 붓으로 번역되었고, 붓은 색으로 가시화되었고, 색은 모티브로 형태를 얻게 된다. 이야기인지 노동력의 논리에 우선권을 부여할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아있지만, 예술가적인 노동력과 시각적 논리의 사이(difference)는 화면의 긴장감과 생동감을 선사한다. 쉽지 않은, 그러나 가치 있는 그만의 독자적인 회화론이다.
 

함명수의 회화론 ● 하나씩 뜯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민들레」는 사물이고 사물은 모티브이고 모티브는 회화라고 서슴없이 주장하는 회화론. 회화론의 논리적 구조와 그 조건은 무엇인지 찾아보자. 일상에서 손쉽게 접하는 한강변의 민들레와 화면의 민들레는 같은 사물이다. 실재의 세계와 이미지의 세계가 교차한다. 흑백의 화면을 가득 채운 민들레의 형상形象(Figure)이 붓으로 그려졌다. 그려진 형상의 이미지는 붓의 흔적을 가시화 한다. 또한 붓의 유희로 민들레의 강인한 생명력이 화면에서 읽혀지고 읽혀진 생명력은 다시금 물감으로 그 존재가 드러난다. 바람에 휘날리는 꽃 봉우리들을 따라가면 어느새 붓의 유희로 충만한 화가의 논리(Picture)속에 들어왔음을 깨닫는다. 자연에서 자라는 식물이 응시(Gaze)자의 위치에서 가시화되어 민들레=모티브이고 모티브=회화가 되었다. 추상적이자 정면적인 시각視覺으로 전환된 작품이다. 물감의 흔적과 대상의 이미지가 혼재하고, 붓의 흐름과 물감의 흔적이 화음을 내고, 대상의 이미지가 화면의 생명력을 매혹한다. 혼재와 흔적과 매혹을 관통하는 작가의 자아의식이 화면에 배여 있다. 모티브 회화로 스며든 예술가적 자아의식은 기존의 비평에서 벗어나 과제를 준다. 회화의 논리는 무엇이고, 회화적 매체와 화면의 내러티브는 어떤 관계인가. 비평의 과제를 지시하는 「민들레」이다. 그리고 이 과제는 회화는 모티브이고 모티브는 민들레이고 민들레는 사물이고 사물은 회화의 시각적 논리이고 이 논리는 회화론이라고 주장에서 구체화된다. 색과 붓이 회화적 논리가 실마리를 제공한다. 함명수의 이러한 시각적 논리가 관객과 어디까지 소통을 할런지, 민들레의 구조와 이야기에서 벗어나 회화의 논리가 어디까지 이해될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재건축=시각적 회화에 시선을 모아보자. ● 옥상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한 재건축현장을 담았다. 어린아이의 장난감 놀이 혹은 한올한올 수를 놓는 뜨개질이 연상(촉각적)되기도 하지만, 화면의 건축물들은 밝고 힘찬 색동옷으로 입혀져 있고, 색은 건축물의 형태적 자태를 드러낸다. 원근법의 논리로 도시의 재개발 현장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가로세로를 가로지르는 도로변에 어깨를 마주하고 서있는 고층건물들, 건물의 외관이 다채로운 색으로 덮여있고, 다채로운 색은 수직과 수평, 응집과 흩어짐, 겹침과 분산으로 왕래한 붓의 존재를 보여준다. 꿈틀거리는 붓 터치가 건축물의 형태를 가시화 하는 것이 아니라 색의 형태가 건축물의 외관이 되었다. 따라서 재개발지역의 형상은 색들의 모임이고 색들의 모임은 수많은 붓질로 꿈틀거린다. 색과 형태의 불가분의 관계가 이미 추상미술(칸딘스키)에서 체계화되었지만, 화면 위의 원근법적인 공사현장이 작가의 회화론에서 읽혀져 다분히 차이가 있다. 화가의 눈에 비친 일상적인 공사현장이 색으로 뒤덮였고, 색의 형태는 공사현장으로 번역되었고, 번역된 색의 형태는 붓의 존재가 된다. 따라서 화면의 이미지는 색의 형태이자 색의 형태는 붓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따라서 화면의 모티브는 건축현장이 아니라 색의 형태가 되는 작품이다. 이는 함명수의 작업과정에서 알 수 있다. ● 드로잉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과정, 붓의 흔적을 그리고(painting), 붓의 흔적은 모티브의 형태에서 자태를 드러낸다. 우리는 일상에서 사물의 형태를 구별하고 인식된 사물은 색의 형태로 분간하지만, 「재건축」은 이러한 시각적 경험을 뒤집는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건축현장도 그렇다고 한국의 현실도 아니라 회화의 논리이고, 그리고 이 논리는 붓의 생동감이 화면의 모티브로 가시화되었다. 또한 한눈에 볼 수 없는 건축현장이 원근법의 원리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 원리는 작가의 시선과 관찰자의 시선을 담보한다. 정면성의 민들레가 관찰자와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면, 여기서는 원근법적인 도시의 재건축 현장이 작가의 위치에서 포착된 것이고, 관객은 화면에서 회화=모티브를 목도하게 된다. 관객과 조우하는 함명수의 논리적 전략이기도 하다.
 

달=시각적 논리 ● 얼마 전 우주 여행이 한국의 언론을 뒤덮은 적이 있다. 한국 최초의 우주인이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우주선에서 바라본 달의 모습을 우리는 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 타자의 눈으로 우리는 달을 보았다. 작가의 화면도 마찬가지이다. 흑백으로 그려진 달의 세계이다. 달의 중앙에는 긴 사각형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아직은 착륙하지 않은 우주공간에 포착된 달의 형상이다. 토끼가 방아를 찧던 기억이 아니라 사진으로 전송된 달의 이미지가 작가의 화면에서는 그리는 즐거움으로 번역되었다. 사각형이 시선을 집중하고 달 전체의 형태는 멀어진 시각이다. 마치 우리도 우주공간에서 달을 바라보는 듯하다. 유기체적인 흑백의 덩어리가 달의 표면을 설명하고 설명된 유기체는 다시금 작가의 손놀림을 가시화 한다. 그리고 집중적으로 조명된 사각형에는 괴인 물과 녹색의 풀들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캔버스는 사각형이라는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작품이지만, 시각은 다층적이다. 우주공간의 달을 보기까지 걸쳐야 하는 시야가 화면에서는 관찰자의 시각적 논리를 구조화한다. 첫째로는 지구에서 출발한다. 둘째로는 우주공간에 떠있는 별들의 세계를 걸친다. 셋째로는 달의 둥그런 형상이 시야에 포착되어야 한다. 넷째로는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는 달의 표면이 시야에 잡혀야 한다. 이렇듯 모티브인 달은 시각적 거리를 담보한다. 「재건축」의 시각적 논리에서 한 발짝 더 진일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은 모티브이고 모티브는 그리는 노동력이고 노동력은 붓으로 가시화되고, 붓의 존재가 색으로 읽혀지는 함명수의 회화론은 변함 없다. 단지, 옥상 위의 작가의 시선과 우주공간이 시야에서 다를 뿐이다. 작가의 눈으로 바라본 달의 세계, 관객과의 대화(Dialog)를 요구하는 이 작품은 동심과 과학이 공존하기 때문에 가깝게 다가오는 것은 아닐런지.
 

책의 퇴적=회화의 모티브 ● 관찰자와 대면을 요구하는 대형화면이다. 일대일의 관계에서 분석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볼 수 있는 거리와 그릴 수 있는 거리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위로 쌓인 고서점의 책들이 퇴적암의 층들과 비유되기도 하지만, 손이 닿은 지점과 그렇지 않은 거리가 붓의 흔적으로 가시화되었다. 이렇듯 작가의 손과 화면의 접촉은 관찰자에게 보는 방법을 지시한다. 예술가적 회화론의 근간을 이루는 색과 붓의 관계가 여기서는 시각적 거리와 캔버스와 접촉의 거리로 나타나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촉각의 세계가 색과 붓으로 번역되어 화면 속의 이야기는 대면으로 구체화되었다. 다르게 말하면 모티브인 퇴적된 책들은 화면 속으로 우리의 시각을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가깝고 멀리서 관찰하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적 움직임으로 색들의 형태와 붓의 흔적이 어떻게 조우하는지 분석하라고 지시한다. 결국 퇴적된 책들은 붓의 흔적이고 붓의 흔적은 색으로 가시화되었고, 색의 형태는 퇴적된 책들로 표면화되었다. 이렇듯 작가의 모티브 회화는 화면과의 대면에서 확인된다. 쉽지 않은 그러나 가치가 있는 관조가 아닐까 한다.

함명수의 회화론은 집요하고 끈질긴 노동력의 세계이다. 반면에 모티브는 회화이고 회화는 모티브라는 논리는 미술사적인 지식에 자리한다. 반 고흐가 드로잉과 회화의 세계를 유기적으로 풀어냈다면, 함명수의 작품들은 그리는 붓을 화면의 모티브로 번역한다. 칸딘스키가 색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를 유기체로 풀어냈다면, 함명수의 이미지는 형상과 붓의 존재를 불가분의 관계로 독해하였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들이 가깝지만 어렵게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선택한 일상적인 모티브는 대상의 내용에서 벗어나 붓과 색의 관계에서 목도하게 한다. 모티브의 형상은 시각화되었지만, 대상의 의미가 제거되는 방법으로 선택한 일상적인 모티브이다. 게오르그 바젤릿츠(George Baselitz)의 거꾸로 보는 세상이 연상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상의 의미를 제거하는 방법이 모티브를 거꾸로 그리면 되기 때문이다.
 
● 함명수는 붓의 흔적을 그리면서 대상의 내용을 제거한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것은 화면 위의 이미지가 아니라 모티브이고 모티브는 회화임을 인식하면 된다. 이러한 화면의 논리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단순한 대상을 선택한 작가의 고민이 읽혀진다. 노동의 가치는 그리는 행위에 있고, 그리는 행위는 붓으로 가시화되고, 붓은 색으로 존재를 드러내고, 색은 모티브로 형태를 얻는다. 노동=그리기, 그리기=붓, 붓=색의 형태, 색의 형태=모티브, 모티브=회화, 응시=해석. 이러한 새로운 도식이 함명수의 예술론에 자리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만의 시각적 논리와 회화적 예술론이 어디까지 수용되고 해석될지는 미지수로 남아있지만, 미술사의 노정에도 불구하고 변함 없는 수공업의 세계, 이 세계에 회화는 노동력이고 노동력은 그리는 행위라는 진리는 변함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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