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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용 평론글(갤러리 상 개인전), 2004, 12

작성일 19-05-04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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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기’ 로 ‘그리기’ 를 성찰함, 혹은
탈재현적인 방식을 통해 더욱 재현적인 회화로 나아가기


심상용 평론글 - 2004. 12월




함명수는 사물을 그리는 대신 터치들을 그린다. 함명수의 붓은 대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따랐던 자신의 흔적을 따른다. 그것들은 대상을 묘사하기 위해 처음으로 거칠게 실행되어졌던 붓질의 흔적을 어떤 주관적인 과정을 거쳐, 그러나 섬세하게 복원시켜 놓은 것들이다.
그래서 함명수의 회화는 대상의 앞에서 시작되었다가 역설적이게도 대상의 부재로 끝맺는다. 대상의 묘사에서 출발해 ‘회화의 성찰’ 로 종료된다 할까. 함명수는 “그리기가 지니는 미묘한 매력”, 그리고 그 매력을 성취해가는 과정이야말로 자신의 흥미를 유발하는 테마라 밝힌다. 실제, 그는 회화로부터 ‘그리기’ 이외의 모든 다른 코드들을 배제하기 위해 거꾸로 그리기도 했다. 최근 작가는 이 같은 자신의 방법론에 ‘투어 페인팅(tour painting)' 이란 매력적인 명칭을 부여했다. 즉 그것을 정의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 함명수의 회화 행위 = 자신이 작은 벌레 같은 존재가 되어 캔버스의 곳곳을 속속들이 관찰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으로서의 행위.
이렇게 해서, 함명수의 회화는 온통 다시 되밟아지고, 재발견되고, 재조명된 터치들로 가득 찬, 회고적이고 자기성찰적인 어떤 것이 된다. 바로 이 역사적이고 자기 성찰적인 미학이 대상의 현존성과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이전의 붓질을 복원한 지그재그로 실행된 거친 속사와 대상의 엄연한 정체성은 불가피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줄여 말하면, 결국 대상의 현존성과 존재론적 회화가 갈등의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이번에 작가가 선보인 일련의 꽃그림들도 이와 다르지 않은 맥락이다. 그것들은 분명 대상-꽃-의 성실한 관찰을 동반하고 있지만, 결과는 결코 꽃의 정당한 재현으로만 머물지 않는 것이다. 그것들은 차라리 굵거나 가늘고, 격하거나 온화한 붓 터치들의 운동과 리듬의 변주로 정의되어야 더 옳다.
그렇더라도, 이 매력적인 붓질의 도모가 다는 아니다. 그것들은 꽃잎들마다 물기를 머금고 있는, 너무도 확고하게 살아있는 식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함명수의 회화는 결국 붓질들의 매력적인 변주이자 꽃의 탁월한 재현이기도 한 것이다. 화면가득 촛불을 그린 그림에서도 일정한 간격을 두면서 강하게 실행된 수직의 붓질은 양초 자루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어떤 영속성의 인상을 주는 반복적 지표이기도 하다.
이 상치되는 두 요소의 상호지원적 관계설정이야말로 함명수 회화의 참 매력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생동하는 터치들은 캔버스를 정지해 있지 않은 공간으로 정의하면서, 동시에 꽃잎들을 훨씬 더 가벼운 바람에도 흔들리는 것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가장 반(反)묘사적인 접근방식이 결국 묘사적인 결과를 지원하고, 탈재현적인 방식을 통해 더욱 재현적인 회화로 나아가게 되는 즐거운 부조리가 문법인 셈이다. 적어도 이 체계 안에서는 재현으로서의 미술/자율성으로서의 미술, 대상의 서술/존재론적 회화의 내러티브가 서로 상충하는 질서가 아니다.
이 두 질서는 적어도 우리가 배운 서구적 문맥에서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함명수 의 방식은 더욱 흥미로운 성공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다. 사실이 존중되거나, 아니면 관념이 존재할 뿐 이라는 미학적 적대주의, 재현이거나 재현으로부터의 일탈이 추구되어야 하리라는 도그마들이 일테면 쿠르베로부터 잭슨 폴록 까지를 오갔던 서구 미술사의 ‘거대서사(meta­narrative)' 아니었던가. 이러한 분리적이고 대립적인 사유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사실과 추상, 그리고 일상과 상상이 화해할 수 없는 상이한 두 차원으로 간주되어 왔던가?

함명수에게 색조와 명도는 사실의 농도를 조절하는 것을 넘어, 그것에 상상의 용액을 섞고 비현실의 요소를 첨가하는 실험도구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방식에 의해 함명수의 것은 더욱 대상이 아니라 ‘조절된 대상’ 으로 화하고, 보여지는 그대로의 꽃이 아니라, 초현실적 상상에 의해 조율된 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환상적인 분위기는 특히 푸른색조의 모노크롬에 변주를 주는 주변의 색들, 일테면, 코발트, 울트라마린, 스카이블루 같은 동종색의 세심한 공존과 조화로 인해 생성된다. 예컨대 스카이블루에 약간의 에머럴드 그린을 섞었을 때, 꽃은 훨씬 더 부드러운 녹턴의 설화 쪽으로 기울게 된다. 작가는 꽃잎 주변의 음영에 더 할 수 없이 짙은 다크 울트라마린을 사용함으로써, 그 한 송이의 꽃이 얼마나 많은 함축된 어두움으로부터 피어오르는 것인가를 시적으로 암시한다. 터치들은 이 사실과 꿈의 예민한 조합에 성격을 부여하는 악상부호들의 역할을 한다. 그것들에 의해 이 예민함에 격한 단속들과 느슨한 지속, 강렬한 고음과 넓은 저음의 긴장감어린 변주가 야기된다.
함명수의 회화는 명도의 과장을 통한 광선효과와 모노크롬의 비현실적인 효과에 의해 더욱 세련되고 개성적인 것이 된다. 특히, 푸른색조의 모노크롬은 그의 회화를 훨씬 더 실제로부터 벗어나 있는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이끈다. 푸른색 톤들의 다양한 명도대비들은 넓고 늘어진 꽃잎 위에 몽환적인 빛을 형성해서, 마치 흠뻑 달빛을 받고 있는 듯 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 빛은 작가가 타오르는 수 십 개의 촛불을 그렸을 때, 그의 세계에서 더욱 간절한 주제임이 드러났던 바로 그 빛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검회색의 모노크롬으로 뒤덮인 어두운 세계에서도 부단히 주변을 밝히며 자신을 태우던 그 촛불 같은 것 말이다.
결국 함명수의 세계에는 언제나 빛과 어두움, 드러남과 감추어짐이라는, 예컨대 무채색조의 어두운 배경과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부단히 타오르고 촛불이라는 대립된 명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그토록 불꽃을 유지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촛불들, 그리고 짙푸른 미명 속에서 스스로를 도저히 드러내는 한 포기의 식물이야말로 밝음에 대한 소망이라는, 작가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주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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