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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호 월간미술] 세계의 따뜻한 관찰자와 그 해석의 품위 ( 심상용 _ 서울대 교수)

작성일 19-10-15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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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따뜻한 관찰자와 그 해석의 품위

그의 작업실이 풍납동에서 홍천으로 옮겨가는 동안, 함명수의 삶과 회화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함명수는 더는 <Time Square>를 그리지 않는다’로 함축할 만한 변화다. 소재가 결정적인 요인인 것은 아니더라도, 어떻든 현재 그는 도시를 떠나 홍천의 품에 안겼고, 현란한 도시의 밤을 그리던 풍납동 시대는 그렇게 접혔다. 빌딩들, 도시를 화려하게 수놓은 전광판들, 원색의 항연으로 꿈틀대는 밤의 도시, 풍납동 시절에 그가 그리기에 탐닉했던 그것들은 이제 그의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가 자연을 그리기의 대상으로 삼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모방하는-재현하는-대상에 대한 경배와 예찬이라는 모방 미학 특성의 맥락에서 보면, 이 변화는 단지 소재나 대상의 변화 정도로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이는 영혼의 태도 또는 존재내적 지향의 변화의 외현일 개연성이 큰데, 도시가 사탄의 요새인 반면 자연은 하나님의 품이라ᅟᅳᆫ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Christophe Blumhardt)의 비유를 따르자면 더더욱 그렇다. 2010년대 초반 함명수가 그린 도시들은 어거스틴(Augustine)이 그렇게 불렀던 ‘지상의 도성(terrena civitas)’의 일레스트레이션 같다. 매일 밤 카인의 제의식이 열리는 곳, 그 화려함, 열기, 수직의 교만함, 욕망에 미혹된 노예들의 집성지, 눈먼 자들의 도시, 제 2의 바빌론, 그리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순식간에 몰락한 로마!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Antigone)에서 이렇게 외쳤다. “창조자는 도시를 갖지 못하는 법이다!” 무엇보다 그곳에선 세계에 계시되는 신성(神性)의 표지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함명수가 요사이 왜 사이프러스 나무를 그리는가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사이프러스 나무는 캔버스를 가로지르며 위로 향해 상승한다. 비록 형태는 다소 과장돼 있지만, 그 내부는 여전히 역동적인 그리기의 흔적들, 캔버스의 표면을 스쳤을 붓 터치의 기억으로 충만하다. 이는 모방과 재현미학의 틀을 뒤틀어버린 그의 ‘투어 페인팅(tour painting)’의 맥락이 여전히 견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임이 분명하다. 그렇더라도 대상으로서 사이프러스를 대하는 태도는 분명히 이전과 다르다. 그 태도란 인간과 자연의 상호 관계에 관한 것으로, 독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이 인간을 ‘그 안에 인격을 지닌 자연’으로 정의한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자연을 그 안에 신성의 계시가 내제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그러니까 빈센트 반 고흐가 그것을 즐겨 그린 이유이기도 했던, 자연에 내재하는 초자연에 대한 반응의 측면에서 그렇다. 1890년 반 고흐가 <사이프러스가 있는 길>을 그렸을 때, 그 심경은 자신도 그 수목처럼 자신을 둘러싼 거친 실존에 굴하지 않기를 바라는 기원과 관련되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은 형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이프러스의 초지일관하는, 꿋꿋하게 저 위를 향해 뻗어가는 그 속성이다. 그 올곧은 수직성은 도로시 세이어즈가 그것을 따라 살았을 때 무력감에 빠지고 우주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것처럼 느끼곤 했던, 변덕스러운 ‘인간사회의 패턴’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강직한 속성이다. 근본적으로 비뚤어져 있는 인간의 내면으로선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속성이다.
 이 세계의 방점은 특정한 대상의 그리기에 있지 않고 그리기 자체에 있다. 이 세계는 정물화나 풍경화, 인물화 같은 전통적인 장르적 구분 밖에 있다. 대상의 특정성은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다. 정물이건 풍경이건 그가 무언가를 그리기로 마음먹는다면, 그것은 그 대상이 이성적으론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사유를 촉발하는 근원 행위로서의 그리기를 유혹하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그것이 무엇이건-특별한 것으로 만드는 이 그리기의 독창적인 에너지다. 나는 이미 14년 전인 2004년 함명수 회화의 이 멋진 여정, 곧 ‘대상의 재현에서 시작해 회화의 성찰로 종료되는 것에 대해, 또는 사물의 표면을 조정해 그 내재적인 특성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으로서의 그리기에 주목했는데, 이 진술은 그 당시에는 누락됐던 한 가지 사실을 추가함으로써 보다 온전한 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은 함명수 회화의 보다 경이로운 측면으로, 그리기의 그 비재현성이 존재성을 삭감하거나 해체하기는커녕 오히려 보완하고 고양시키는 쪽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다. 이 회화의 탈장르적이고 비재현적인 그리기의 대상을 폄하하는 대신 존중하고, 세계를 부정하는 대신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생명에 대한 감각의 고양
함명수의 회화는 밤의 도시의 향연과 그 녹아내릴 듯한 욕망의 결을 소재로 삼을 때조차 어둡고 음습하기보다는 경쾌한 톤과 유희적인 리듬으로 조율되는 낙관적인 뉘앙스를 잃은 적이 없다. <Time Square>광장에 쏟아져 나온 ’마치 영혼을 팔아버린 허깨비“ 와도 같은 군중도 함명수의 세계에선 훨씬 덜 절망적이다. 혼탁한 채도를 활용하지 않으면서도 이 그리기는 도시의 기만적인 가설들을 다룰 수 있었다. 명도를 조금도 상실하지 않으면서 메멘토 모리의 처절함을 묘사해낸다. 이 독창적인 그리기로 인해 함명수의 회화는 절망적인 것이 분명한 순간에도 따뜻한 관찰자의 해석적 품위를 잃지 않았다. 이는 분명 그의 내면의 정체성, 영혼의 태도와 결부되지 않고서는 설명하기가 어려운 문제다.
 홍천에서 함명수의 최근의 관심사는 이 과정을 훨씬 더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다. 학습과 경험을 통해 이제껏 세워왔던 회화적 가설들로부터 한층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모더니즘 회화의 덧없는 강령들로부터 더 멀어지는 동시에 컨템포러리 아트가 주선하는 교모한 혼돈과 교활한 무질서를 경계하는 것, 그렇기 전에는 허용되지 않을 자연과 자연에 내재하는 신성의 계시에 이끌리기, 그때그때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손이 따르도록 하는 조형적 내려놓기의 훈련, 마음의 자취를 선이 바짝 뒤따르는 긴밀한 조응의 밀도를 더하기, 이 모든 결과로 그리기 자체가 삶의 흔적이자 자취의 연장이 되도록 하기, 주제와 형식, 그리고 내용과 기법, 이미지와 구성을 분열시켰더 그 분열의 틈새를 더는 허용하지 않기로서의 그리기를 통해 함명수는 자신의 그리기에 홍천군 두촌면의 자연을 담아내는 다른 용도를 부여하고 있다.
 포스트 아방가르드 이론가이자 현대미술 평론가인 도널드 쿠스핏(Donald Kuspit)은 컨템포러리 아트의 기원이 현대인의 공허하고 불안한 삶에 있다고 했다. 출구 없는 현대적 삶이 형식적 불안정성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유의 담론들에 힘입어 온갖 종류의 인지적 충격을 주는 수단을 찾는 행위들이 평론가들로부터 독창적이라는 찬사를 받는 것이 컨템포러리 아트의 정당한 절차로 공식화되었으며 여전히 그렇게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전반적인 경향은 결과적으로 인생과 미래에 대한 일반인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부조리한 삶이 부조리한 조형과 이미지의 체계를 만드는 이상으로 부조리한 조형과 이미지의 체계가 부조리한 삶을 방조하고 선동하기 때문이다.
 냉소주의자들의 엘리트적 방관과 회의론자들의 불행하 독설로 차고 넘치며, 전통을 존중하고 진지한 태도로 행동하고 표현하려는 사람들을 시대착오로 내모는 컨템포러리 아트의 경향에 많은 사람이 지치고 피곤해 하고 있다. 생명성에 더 헌신하는 지성, 삶과 살아있음에 의해 더 긴밀하게 조율되는 조형과 이미지의 체계가 절박하게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것은 함명수가 자신을 자연에 전향적으로 투항시키고, 자신의 그리기를 자연에 내재하는 카이로스(Kairos)의 계시에 한층 더 근접시켜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그리기가 더 생명력을 머금은 것이 되고, 그 앞에 서는 사람들에게 생명에 대한 감각을 고양시키는 것이 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심상용 _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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