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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기에 대한 그리기 -이관훈 평론글 - 2001. 5월

작성일 19-05-0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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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기에 대한 그리기


이관훈 평론글 - 2001. 5월



언제부턴가 함명수의 작업실에는 벽면에 “그려야 나온다, 그리면 느낀다, 나를 인도하는 아름다운 힘”이란 글귀가 붓으로 쓰여 져 있다. 그 글을 본 이후로 난 그 곳을 갈 때마다 그의 작업이 내 시야로 점점 더 강하게 접근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글은 98년 개인전이후 그간의 자기작업에 대한 회의가 짙어지면서 반발․반동․반성에 대한 결의로 자신을 질타하는 데서 비롯된 것인데, 지금은 작업에로의 ‘가르침’을 주는 출구(門)가 되었다.

그전의 작업들―<투명한 공간>(1992-1995), <사유(思惟)공간>(1996), <사유지형도>(1996-97), <사유도>(1997-98)―은 제목에서 읽혀지듯이 공간 구성에 대한 관심과 동시에 인식의 흐름을 보여준 작업들이다. 그러니까 사물과 사물사이를 구성하는 것, 전통산수화에 깔려 있는 공간인식을 탐구하는 몽환적 재현-구성으로부터 좀더 현실에 접근한 시각을 나타낸 것, 예술과 사회라는 메시지를 가지고 신문을 거대한 지형도로 전환시키는(자연적인 이미지가 사회적인 지형도로 변화되는) 것, 거꾸로 대상을 조감하는 방법으로 자신이 대상을 어떻게 보는 가에 대한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것 등의 내용으로 그는 나름대로 ‘그리기’라는 방법적 접근을 꾸준히 해왔다.

“나의 ‘사유도’에는 온전한 재현, 재생은 없으며 ~같은, ~같이, ~처럼 만이 있다. 그것은 완전한 추상화된 관념들로 머물지도 않으며, 다분히 진행적, 과정적 시간 경과에 의해서 드러나거나 머무르는 가역可逆적인 변이를 주시한다. 결정지은 의미나 형식에 따라 작업을 진행하지 않으며, 여행하듯 산보하듯 걸어가며 만나고 만들고 지우고 파고들고 뭉개버리고... 이렇듯 진행하며 서로가 관계를 갖고 있다 싶으면 손을 뗀다.” … “그림에는 내가 있다. 그림에는 내가 없다.”(작가노트 중에서, 1997)

이러한 작가의 독백처럼 그전의 작업들은 함명수로 하여금 여러 물성 또는 생각들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게 인식되어 왔고, 체험(실험)되어지는 과정 속에서 자신을 포장하고 있는 무거운 껍질(창작이란 마치 엄청난 이데올로기를 가장한 정치적 음모를 믿고 있다는 데서 출발한 점)에서 차츰 벗어나 자신의 알몸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응시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작업들은 자기를 찾아가는 ‘길목’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는 한때 예술(미술)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자 미학/미술사 관련 이론과 이즘을 접했지만 결국 그림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림 속에 그림을 보아야 회화가 지닌 힘을 발견 한다’라고 스스로 확고한 의지를 갖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사실 동시대 작가는 학습(학교, 학술, 미술서적, 매체)을 통해 거의 그러한 이즘이나 미학 이론을 자의든 타의든 영향을 받고 작업을 하지만, 몇몇 작가들은 수백 년 동안 내려오는 그 이데올로기의 무게를 지탱, 소화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갖는다. 현대는 미술뿐만 아니라 타 분야에도 온갖 텍스트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런 것들이 작업의 실마리가 되지 않고 하나의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존립하는 상황이 몇몇 작가들에게 초래되고 있다. 그저 ‘그린다’에 맹목적인 그러면서 그것 자체가 모든 문제를 수용한다는 의지가 짙게 깔려 있다. 그것은 르네상스시대 이후 회화 평면을 지배해 온 환영적인 깊이감을 제거하고 회화 자체의 평면성(회화의 순수성 회복)을 되찾고자 한 20세기 초 추상미술의 움직임과도 연관 지을 수 있으며, 동시에 지나치게 질료적, 형식적 테두리에 몰두했던 몇몇 경향에 약간의 반발적인 태도가 곁들여진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작업을 ‘회화의 얼굴-자화상’이라고 스스로 명하는 것이 그 태도에 다가가기 위한 일종의 자기체면의 기호로서 장치하고자 함이 아니던가.

지금의 함명수는 많이 지쳐 있다. 쫓고 쫓기는 그 여정의 피곤함 뒤에 육신이 지탱하기 위한 명분과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으로 인해 엄청난 인내를 떠안고 있다. 10년 동안 그리기에 대한 집념이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이 지금 끝남이 아닌 또 다른 전쟁터로 내몰고 있다. ‘알 수 없는 그 무엇의 힘’에 의해 기관총이 아닌 소총을 가지고 그 전선에 뛰어 든다. 참으로 지독하다. 요즘같이 이미지 속도전이 펼쳐지는 마당에 무슨 ‘땅 짚고 헤엄을 치는 모션’인가. 그러나 땅 짚고 가다보면 물론 손에 피도 나고 멍도 나겠지만 그 대신 세상을 관조하는 넉넉한 ‘여유로움’을 찾는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느림’이 존재하는 영역이다. 이 영역은 외관상 진보와 개방과 직선적 속도를 표상하는 큰길과는 달리 사소하고 불규칙하지만 굽이굽이 돌아가며 주위를 둘러보고 간섭하고 그러면서 긴밀한 만남이 있는 좁은 비탈길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삶의 흔적을 조금씩 그려가는 모습들을 찾을 수 있고 그 모습에 잔잔한 감동을 적시게 된다. 현재 이 시대는 느림과 신속함의 열띤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다. 사회도 그렇고 미술 영역 또한 그렇다. 결과적으로 신속함, 빠름이 이 문화를 이끌어 가는 대표성처럼 느껴지지만 그 뒤편에는 항상 ‘느림’이 존재하며 ‘느림’은 그것의 속도를 조절하는 중심역할을 한다. ‘느림’은 개인의 자유를 일컫는 가치이자 모든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한 수단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함명수의 최근 작업은 보여진 결과물의 조형적 모습 이전에 그러한 태도가 읽혀진다. 언뜻 이미지는 익숙하고 매우 강해 보이지만 시간의 축적이 묻어있는 흔적들에 의해 퇴행 당한다. 시간여행으로의 복귀…. 그리기에 그리기, 그리기에 대한 그리기, 그리기에 의한 그리기 등으로 일관된 ‘그리기를 추적’하는 그의 행위는 ‘느림=과정’의 행보아래 자유로운 시간의 실뭉치들을 조금씩 풀어 나가는 작업이다. 그래서인지 그 작업들을 ‘면발 풍경’이니 ‘실타래 풍경’이니 하는 용어를 자연스레 붙이게 된다.
이 작업 바로 전에 ‘거꾸로 그리는 작업’(이 방식에서 보여지는 것과 그리는 방식의 경계에서 완성을 해독하는 것보다는 과정과 인식자체가 재현의 중층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임을 깨닫게 되고 이것이 새로운 코드를 읽는 계기가 됨)이 있었는데, 이는 형태를 추적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붓질을 추적한다. 붓질을 대상으로서 ‘붓질’을 그린다. 어떤 대상을 큰 평붓으로 휙휙 그리고 다시 그 붓질을 쫓아 작은 붓으로 땅을 경작하듯이 그려나간다. 거미가 자기 영역을 확보하고 생존하기 위해 자기 몸속에 있는 거미줄을 생산해내어 치는 것과 같이 그 붓질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터전이자 생존의 게임인 것이다.
화면에서는 먼저 구체적인 형상이 뚜렷이 나온다. 그러나 그러한 얼굴, 나비, 책, 램프, 테이블, 거리 풍경, 터널, 패러디한 형체 등이 주제나 모티브에 관계없이 붓질에 가탁假託하여 모호한 경계 위에 위치하고 있다. 그 단어가 지니고 있는 텍스트를 해독하는 것이 아닌 지독히도 겹겹이 그러면서 느리게 꼿꼿이 날이 선 붓질의 의연함으로 형상이 압도당한다. 거리 풍경의 그림을 보자. 일상의 거리 풍경이 온통 붓질의 얼룩으로 도배되어 하나의 물질로 둔갑해버린 꼴이 되었다. 그리기 행위의 한 코드로 간판, 유리문, 나무, 도로 등이 지닌 다양한 성질이 상실되고 설득되어 일상이 죽어버린 결국 행위만 남는 형국이다. 이러한 모양새와 논리가 인물(자화상), 터널, 램프, 작업실, 패러디한 형체 등의 풍경에 같은 의미를 부여한다.
되짚어보면 함명수의 작업은 하나의 형상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한 이미지를 가장하여 그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이미지가 계속 알을 까듯 세분화되어 있다). 즉 이미지가 닫혀 있는 것이 아닌 열려 있다. 그것은 이전작업에서 주요하게 다루어 졌던 ‘이동시점에 의한 대상 읽기’가 체질화되어 이 그림에서 저 그림으로 건너가는 자율적 행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빛, 명암, 입체감 등의 거세나 이미지를 철저하게 해체하면서 또 다른 형태의 재구축의 구조적 인식이 화면을 구성해 나간 것이다.

함명수는 이제 ‘여기서부터’라는 시작의 깃발을 꽂고 먼 여정을 향해 천천히 더디게 나갈 것이다. 작가 스스로 “그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다”라고 늘 되씹듯이 현재 그의 작업이 삶을 지탱하는 생명력의 근원지로서 그리고 동시대에 살아가는 과정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크다고 본다. 이러한 태도가 예전시대의 예술가 상像에서 느껴지는 고집스러움을 떠올리게 되고 동시에 부유浮遊하는 일회적이고 쇼맨십이 강한 작업들에 회화의 진정성을 일깨워 준다.





-요약-

그리기의 추적

언제부턴가 함명수의 작업실에는 벽면에 “그려야 나온다, 그리면 느낀다, 나를 인도하는 아름다운 힘”이란 글귀가 붓으로 쓰여져 있다. 그 글은 98년 개인전이후 그간의 자기작업에 대한 회의가 짙어지면서 반발․반동․반성에 대한 결의로 자신을 질타하는 데서 비롯된 것인데, 지금은 작업에로의 ‘가르침’을 주는 출구(門)가 되었다.
그전의 작업들은 사물과 사물사이를 구성하는 것, 전통산수화에 깔려 있는 공간인식을 탐구하는 몽환적 재현-구성으로부터 좀더 현실에 접근한 시각을 나타낸 것, 예술과 사회라는 메시지를 가지고 신문을 거대한 지형도로 전환시키는 것, 거꾸로 대상을 조감하는 방법으로 자신이 대상을 어떻게 보는 가에 대한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것 등의 내용으로 그는 나름대로 ‘그리기’라는 방법적 접근을 꾸준히 해왔다. 여기에서 함명수는 여러 물성 또는 생각들을 체험하는 것을 중요하게 인식해 왔고, 그 체험(실험)되어지는 과정 속에서 자신을 포장하고 있는 무거운 껍질에서 차츰 벗어나 자신의 알몸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응시하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 작업 중에 ‘거꾸로 그리는 작업’(이 방식에서 보여지는 것과 그리는 방식의 경계에서 완성을 해독하는 것보다는 과정과 인식자체가 재현의 중층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임을 깨닫게 되고, 이것이 새로운 코드를 읽는 계기가 됨)이 있었는데, 이는 형태를 추적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붓질을 추적한다. 붓질을 대상으로서 ‘붓질’을 그린다. 어떤 대상을 큰 평붓으로 휙휙 그리고 다시 그 붓질을 쫓아 작은 붓으로 땅을 경작하듯이 그려나간다. 거미가 자기 영역을 확보하고 생존하기 위해 자기 몸 속에 있는 거미줄을 치는 것과 같이 그 붓질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태도이자 생존의 게임인 것이다.
이러한 최근 작업에서 나타나는 이미지는 매우 익숙하고 강해 보이지만 시간의 축적이 묻어있는 흔적들에 의해 퇴행 당한다. 화면에서는 먼저 구체적인 형상이 뚜렷이 나온다. 그러나 그러한 얼굴, 나비, 책, 램프, 테이블, 거리 풍경, 터널, 패러디한 형체 등이 주제나 모티브에 관계없이 붓질에 가탁(假託)하여 모호한 경계 위에 위치하고 있다. 그 단어가 지니고 있는 텍스트를 해독하는 것이 아닌 지독히도 겹겹이 그러면서 느리게 꼿꼿이 날이 선 붓질의 의연함으로 형상이 압도당한다. 거리 풍경의 그림을 보자. 일상의 거리 풍경이 온통 붓질의 얼룩으로 도배되어 하나의 물질로 둔갑해버린 꼴이 되었다. 그리기 행위의 한 코드로 간판, 유리문, 나무, 도로 등이 지닌 다양한 성질이 상실되고 설득되어 일상이 죽어버린 결국 행위만 남는 형국이다. 이러한 모양새와 논리가 인물(자화상), 터널, 램프, 작업실, 패러디한 형체 등의 풍경에 같은 의미를 부여한다. 시간여행으로의 복귀…. 그리기에 그리기, 그리기에 대한 그리기, 그리기에 의한 그리기 등으로 일관된 ‘그리기를 추적’하는 그의 행위는 ‘느림=과정’의 행보아래 자유로운 시간의 실뭉치들을 조금씩 풀어 나가는 작업이다. 그래서인지 그 작업들을 ‘면발 풍경’이니 ‘실타래 풍경’이니 하는 용어를 자연스레 붙이게 된다.
되짚어보면 함명수의 작업은 하나의 형상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 즉 이미지가 닫혀 있는 것이 아닌 열려 있다. 그것은 이전작업에서 주요하게 다루어 졌던 ‘이동시점에 의한 대상 읽기’가 체질화되어 이 그림에서 저 그림으로 건너가는 자율적 행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빛, 명암, 입체감 등의 거세나 이미지를 철저하게 해체하면서 또 다른 형태의 재구축의 구조적 인식이 화면을 구성해 나간다.


그리기의 추적 - 함명수 개인전(2001년 5월) 평문에서 요약 발췌하여 다시 고쳐 씀(2011년 3월)


언제부턴가 함명수의 작업실에는 벽면에 “그려야 나온다, 그리면 느낀다, 나를 인도하는 아름다운 힘.”이란 글귀가 붓으로 쓰여 져 있다. 이 글은 98년 개인전이후 그간의 자기작업에 대한 회의가 짙어지면서 회화작업의 반발․반동․반성에 대한 결의로 자신을 질타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은 작업 방향의 ‘가르침’을 주는 화두(話頭)이자 출구(門)가 되었다.
그는 그간의 작업들에서 ‘그리기’라는 나름대로 다양한 방법적 접근을 해왔다. 사물과 또 다른 사물의 사이를 구성한다거나, 현실의 상황을 몽환적인 재현과 현대적 조형언어로 결합시켜 전통산수화를 연상시킨다거나, 때로는 예술과 사회라는 메시지로서 매체를 거대한 지형도로 전환시키거나, 대상을 거꾸로 조감하는 방법 등의 내용을 표현해왔다. 여기서 함명수는 여러 물성과 이를 사유하는 것들을 중요하게 인식해 왔고,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을 포장하고 있는 무거운 껍질을 벗겨낸다. 어느 순간 서서히 드러난 자신의 알몸을 응시하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 작업 중에 ‘거꾸로 그리는 작업’이 있다.(그는 이 방식을 통해 그리는 것과 보여 지는 것의 경계에서 재현의 중층적인 변화를 인식하게 되는데, 이 인식변화가 새로운 코드로 전환하게 된다.) 거꾸로 그리기는 형태를 추적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붓질을 추적한다. 붓질을 대상으로 하여 ‘그 붓질’을 그린다. 다시 말해 어떤 대상을 큰 평붓으로 휙휙 그리고 다시 그 붓질을 쫓아 작은 붓으로 땅을 경작하듯이 그려나간다. 거미가 자기 영역을 확보하고 생존하기 위해 자기 몸속에 있는 거미줄을 치는 것과 같이 그 붓질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숙명처럼 생존의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작업에서 나타난 형상이미지는 매우 익숙하고 강해 보인다. 붓질을 해가며 켜켜이 축적되는 붓질의 흔적들에 의해 대상화된(실재) 이미지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며 저편으로 퇴행 당한다. 또한 형상화된 이미지는 보는 이의 근경과 원경의 차이점에 따라 붓질의 움직임에 의한 모호함과 리얼한 형상성이라는 두 가지 형상의 관점을 지니게 된다. 그려지는 대상은 얼굴, 나비, 책, 램프, 테이블, 터널, 패러디한 형체, 도시풍경 등 특별한 주제나 모티브에 관계하지 않고 붓질에 가탁(假託)하여 재현과 번역의 모호한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각각의 단어가 지닌 텍스트를 해독하는 것을 떠나 지독히도 겹겹이 그리고 느리면서 꼿꼿하게 날이 선 붓질의 의연함, 최근에는 붓질에 의해 색채가 섞여지는 등의 재현이라는 가면으로 위장한 채 형상을 왜곡시킨다.
도시 풍경의 그림을 보면, 일상의 거리 풍경이 온통 붓질의 얼룩으로 도배되어 하나의 물질로 둔갑해버린 꼴이 되었다. 그리기 행위의 한 코드로 간판, 유리문, 나무, 도로 등 다양한 형상의 성질은 상실되고 설득되어 일상이 상쇄해버린 결국 행위만 남는 형국이다. 시간여행으로의 복귀…. 그리기에 그리기, 그리기에 대한 그리기, 그리기에 의한 그리기 등으로 일관된 ‘그리기를 추적’하는 그의 행위는 ‘느림=과정’의 행보아래 자유로운 시간의 실뭉치들을 조금씩 풀어 나간다. 그래서 그 작업들을 ‘면발 풍경’이나 ‘실타래 풍경’ 등의 용어를 자연스레 붙이게 된다.
되짚어보면 함명수의 작업은 하나의 형상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으며, 또한 이미지가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다. 그것은 이전작업에서 주요하게 다루어 졌던 ‘이동시점에 의한 대상 읽기’가 체질화되어 이 그림에서 저 그림으로 이어지는 자율적인 리듬과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빛, 명암, 입체감 등의 거세나 이미지를 철저하게 해체하면서 또 다른 형태로 재구축하는 구조적 인식이 화면을 구성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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